창군 원로인 백선엽 예비역 대장이10일 오후 11시4분께 향년 100세를 일기로 별세했다.백 장군은 최근 지병으로 건강이 많이 악화된 것으로 알려졌다.백 장군 측에 따르면 최근엔 사람을 잘 알아보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고인은 1948년 육군 제17연대장에 임명되어 1950년 8월에는 수도사단장으로 낙동강 방어선에서 북한군의 침공을 격퇴하고 영천전투에서 승리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후 국군 제17연대를 이끌고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서울탈환에 크게 기여했다.이어 공로를 인정받아 국군 최초로 대장에 진급했지만, 일제 강점기 시절 간도특설대 장교로 복무한 이력 때문에 친일행위자로 지목되기도 했다.
백선엽은 1920년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 덕흥리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평양에서 지냈다.1939년 3월 평양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교직에 종사했지만 군인의 꿈을 차마 버리지 못하고 1941년 12월 만주국 봉천의 봉천군관학교에 진학하여 제9기로 졸업한 뒤 자무쓰 부대에 배속되었다. 1943년에는 간도특설대로 전근, 3년 동안 이 부대에 배치되어 활약해 그는 친일반민족행위자로도 분류되었다.
일본군 간도특설대에 배치됐던 그는 해방 직후인 1945년 평양에 돌아왔고, 조만식의 비서로 일하다 김일성이 권력을 잡자 그해 12월 월남했다.
월남 직후 군사영어학교를 거쳐 국방경비대에 입대,1946년 2월 부산 제5연대 A중대장을 맡았다. 국방경비대가 정식 한국군이 된 이후에는 육군본부 정보국장으로 복무하였으며, 이때 벌어진 여순사건 당시 공산 게릴라 소탕과 주동자 색출 및 처벌의 재판장이었다.
당시 여순사건 이후 남로당 계열의 군인을 숙청하는 '숙군'과정에서 박정희는 체포되어 조사를 받고, 이후 1949년 2월 '군병력 제공죄'로 사형을 구형받은 뒤 결국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이때 백선엽은 육군본부에서 정보국장으로 재직 중이었는데 김안일 방첩대 과장을 통해 직접 면담한 후 만주 시절 동료 20명으로부터 '박정희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는 보증서를 제출받고 무죄 방면시켜줬다.
뿐만 아니라 백선엽은 불명예 제대한 박정희를 정보국에서 문관신분(현 군무원)의 북한반 상황실장으로 일할 수 있게 배려해 주었다.당시 정보에서 예산 문제로 문관 월급을 보장해 줄 수 없다고 했지만 백선엽은 자신의 판공비 일부를 떼어서 박정희의 월급으로 지불했다.1953년 박정희를 장군으로 만들어준 이도 백선엽이었다. 경무대에서는 남로당 전력을 문제삼아 제외하려 했으나 인사를 백선엽은 강행했다.
백선엽은 1950년 4월에 대령 계급으로 제1사단장이 되어 개성 지역을 담당하면서 6월 당시에는 경기도 시흥에서 고급 간부훈련을 받는 중이었다.
이후 6·25 전쟁 당시 낙동강 전투와 38선 돌파 작전 등 결정적인 전투를 지휘했으며 그 공로를 인정받아 1953년 33세의 나이로 한국군 최초 대장 자리에 올랐다.
백선엽은 1953년 12월 15일에 한국군 최초로 탄생한 야전군급 부대인 제1야전군의 초대 사령관을 지냈으며, 1952년(7대)에 이어 1957년에 육군참모총장(10대)을 역임했고, 정권 말기인 1959년에는 합동참모의장(4대)에 부임했다.이후 백선엽은 4.19혁명 이후인 1960년 5월 31일 예편하고, 7월에 중화민국 주재 대사로 부임했다
5.16 군사쿠데타 직후 중화민국 주재 대사로 타이페이에 있던 백선엽은 미국 대사와의 면담에서 박정희의 전력을 이유로 사상을 의심해봐야 한다고 발언했다.직후 중화민국 주재 대사에서 유럽/아프리카 총괄대사로 전임되어 한국에 들어오지 못하고 유럽과 아프리카, 캐나다를 떠돌다가 모친 병환을 이유로 잠시 귀국했을 때 박정희를 면담하고 나서도 2년 뒤인 1969년 12월에야 교통부장관으로 임명되어 10년 만에 한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렇게 거의 10년이 지나 군내 인맥이 싹 박정희 충성파들로 교체되고 백선엽이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된 뒤에야, 박정희는 백선엽을 불러들였다. 그래도 과거 남로당 활동 전력을 비호해준 은혜를 배려했는지, 1969년 10월에는 교통부장관(19대)에 임명되었다. 이후에는 당시 대한민국의 몇 안 되는 핵심 화학기업이던 충주비료(1비) 사장을 맡았고, 1970년대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에 따라 호남비료(2비) 사장을 겸직하며 1973년에 한국종합화학공업으로 합병하는 작업을 지휘했다. 이후 박정희 정권이 종식된 1980년까지 장기간 한국종합화학 사장을 지내다가 퇴임했다.
한편 백선엽은 부동산으로 상당한 자산을 모으기도 했다. 대표적인 자산으로는 강남역 5번 출구 앞의 덕흥빌딩이 있다. 이 건물은 땅값만 공시지가 기준으로 350억원이 넘고, 건물 전체 시세는 최소 2천억 원이 넘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이태원의 자택만 해도 시가 50억 원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백선엽의 사촌누나는 명동 사채시장의 큰손 '백 할머니'로 이름을 떨친 백희엽이기도 했다. 전설의 '백 할머니' 백희엽은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의 스승으로도 유명한 사람이다.
한편, 백선엽 장군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30호실에 마련되며, 발인은 오는 15일 오전 7시다. 장지는 국립대전현충원으로 현행법에 따라 안장될 예정이다.